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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로 세상읽기] 비극적 역사와 ‘기억투쟁’

시간은 모든 것을 원자화하고 해체하는 마력이 있다. 과거의 사건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총총히 사라지고 망각의 늪에 쉬이 빠진다. 기억되는 것은 이어지고 잊힌 것은 사라진다. 기억되어야 할 것이 사라지고 잊혀져야 할 것이 이어질 때 역사는 후퇴한다.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반드시 기억해야만 할 역사적 사건들이 있다. 비극적으로 아픈 역사일수록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지난 역사를 기억하지 않음은 그것으로부터 배우지 않음이다. 과거의 비극적 사건에 대한 선택적 기억과 집단적 망각은 역사 인식의 오류를 초래하고 비극적 경험을 반복하게 한다.   올해는 한국전쟁 75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반도에는 끝나지 않는 전쟁이 여전히 진행중이다. 전쟁을 겪은 세대를 이제는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오랜 시간이 흘렀다. 한반도 전역을 초토화한 이 전쟁은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은 우리 역사다. 그러나 반드시 잊지 않아야 하는 비극적 역사다. 기억은 단순한 의무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덕적 책무다.   재일조선인 작가 서경식은 일제 식민지배와 이후 한국전쟁으로 인한 한반도 분단의 아픔을 경험한 역사 인식을 토대로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라 묻는다. 이러한 물음에 대해 그는 잘못된 비극의 역사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기 위해 필히 기억해야만 하는 고통들이 있음을 역설한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모든 행위는 기억을 전제로 한다. 공유된 기억은 과거,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기에 방향성을 띤다. 기억은 사건을 항상 새로이 연결하고 관계망을 만들어내는 힘을 제공한다. 인간 역사와 서사 문화는 기억 때문에 이제껏 지속되어 왔다.   어제의 역사보다 오늘의 역사가 나으려면, 그리고 오늘의 역사보다 내일의 역사가 보다 희망적이려면 무자비한 학살과 처참한 전쟁으로 죽어간 무고한 이들의 고통을 기억해야만 한다. 이것을 ‘기억투쟁’이라 한다. 북한 공산당의 침략으로 찢긴 산하와 민족적 내상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그 참화로부터 살아남은 이들과 그 후손들은 기억투쟁에 필히 참여해야 한다. 세월과 함께 잊혀 가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고 지켜내려는 기억투쟁은 매우 중요하다.   예루살렘에 홀로코스트 박물관 ‘야드바셈(Yad Vashem)’이 있다. 홀로코스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군에 의해 수백만 명의 유대인들이 무참하게 희생된 대학살을 일컫는다. 야드바셈은 “그들의 이름이 나의 성전과 나의 성벽 안에서 영원히 기억되도록 하겠다. 아들딸을 두어서 이름을 남기는 것보다 더 낫게 하여 주겠다. 그들의 이름이 잊히지 않도록, 영원한 명성을 그들에게 주겠다”(사 56:5, 새번역)라는 성경 구절에서 유래한다. 히브리어 ‘야드’는 ‘기억’이나 ‘기념’을, ‘바셈’은 ‘이름’을 각각 뜻한다.   이 박물관에는 학살된 유대인들이 남긴 각종 유품, 사진과 자료 등이 전시되어 있는데 마지막 출구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다. ‘기억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나 망각은 우리를 다시 포로로 만든다.’     과거는 흘러간 옛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을 규정하는 엄연한 현실이다. 그것을 잊어버리면 자기 정체성이 사라져 미래는 더욱 암담해질 수밖에 없다. 뼈아픈 역사를 망각하는 자는 그 역사를 다시 살게 될 것이다. 망각은 불행과 폭력을 다시 불러내는 주술이고 비극적 전쟁과 전쟁의 참화를 재연하게 하는 시발점이다.   유대교 랍비 아브라함 헤셀은 말한다. “기억은 신앙의 근원이다. 신앙한다는 것은 기억하는 것이다.”     실제로 기억 없는 신앙이란 거의 상상하기 어렵다. 과거에 살아 역사하신 하나님을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으로 기억하며 그 기억을 현재화하는 것이 신앙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매년 유월절 의식을 통해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자신들을 해방시키신 하나님을 기억한다. 그 기억은 하나님을 역사의 주관자로 인식하게 하는 신앙의 요체다. 생생한 기억과 기념에 근거한 서사와 역사의식은 현시대의 비극을 끊고 미래 희망의 연대기를 쓰게 할 윤리적 실천이며 정신적 보루다. 이상명 / 캘리포니아 프레스티지 대학교 총장성서로 세상읽기 기억투쟁 비극 역사 인식 비극적 전쟁 지난 역사

2025-06-09

[성서로 세상읽기] 초고령화 시대의 ‘은빛 청년들’

예상보다 빠른 속도다. 초고령화 사회로의 진입 속도를 이름이다. 유엔(UN)은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기준으로 7% 이상 고령화 사회, 14% 이상 고령 사회, 20% 이상 초고령 사회로 구분한다.     한국은 행정안전부 주민등록 인구 통계에 따르면 65세 이상 인구가 1024만4550명으로 전체 인구(5122만1286명)의 20%를 넘은 것으로 집계되어(2024년 12월 23일 기준) 이미 초고령 사회에 진입했다.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어 두 번째다. 이런 추세라면 한국은 65세 이상 고령인구 비중이 2046년부터 일본을 넘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르며, 2062년에는 홍콩을 제치고 전세계에서 가장 고령인구 비중이 높은 나라가 될 것이다.     이런 초고령화 속도는 세계적으로도 최고 수준이다. 고령 사회에서 초고령 사회로의 진입은 일본 10년, 독일 36년, 프랑스 39년이 각각 걸린 반면에 한국은 7년 만에 초고령 사회로 접어들었다.   미주 한인사회의 역사는 한민족이 걸어온 근현대사의 축소판이자 미러 이미지(mirror image)다. 미주 한인사회와 한국이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란 뜻이다. 한국의 국내 현실이 큰 여과 없이 그대로 미주 한인사회에 투영되어 왔음을 안다면 가장 빠른 속도로 초고령 국가가 된 한국 사회의 변화는 미주 한인 교계와 사회의 미래를 가늠하는 바로미터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의 현실은 어떠한가.   인구조사국(U.S. Census Bureau)에 따르면 미국은 2015년 15%를 넘어 고령 사회로 진입했으며, 2030년엔 20%가 넘는 초고령 사회로 진입할 것으로 전망된다.   2024년 1월 기준으로 미국의 100세 이상 인구는 세계에서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많고, 향후 30년 동안 4배로 증가할 것으로 추산한다. 미국 시장조사 전문기업 인사이더 인텔리전스(Insider Intelligence) 또한 2030년까지 모든 베이비붐 세대가 만 65세 이상이 될 것이라고 내다본다.   저출산, 초고령 사회는 머지않은 미래에 세계의 판도를 크게 바꾸어 놓을 것이다. 지나 러몬도 미 상무장관은 “고령화 문제가 벽돌 더미처럼 미국을 강타할 것”이라고 했으며,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는 “저출산에 따른 세계 인구 붕괴는 인류 문명에 지구 온난화보다 훨씬 큰 위험 요소”라고 주장했다.     초고령 사회로 전 세계가 재편되면서 가장 심각한 타격을 받을 분야는 경제다. 고령화에 휘감긴 지구촌의 어둔 풍경을 세계 경제에 덮치는 ‘은빛 쓰나미’라 표현할 정도다. 생산 가능 인구가 줄고 소비가 위축돼 국가 경제가 저성장의 늪에 빠질 우려가 심각하다.     가족구조 변화와 은퇴 후 사회적 역할 축소 및 상실, 배우자 사망, 죽음에 대한 두려움, 신체기능 저하, 경제력 감소 등 노년기에 맞닥뜨리는 여러 가지 삶의 변화와 문제들이 우울, 외로움, 고립감, 자괴감 등을 유발한다. 급기야 스스로 사회적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 여겨 극단적 선택으로 치닫기도 한다.   “노인들을 어떻게 살릴 것이냐고 세상에 묻지 말고, 노인들이 세상을 어떻게 살릴 것인지를 물어야 할 때이다.” 스탠퍼드 장수연구센터(Stanford Center on Longevity)의 설립자이자 심리학자인 로라 L. 카스텐슨 교수의 말이다.     시편 기자는 자신의 노년을 위한 기도를 다음과 같이 올린다. “내가 이제 늙어서, 머리카락에 희끗희끗 인생의 서리가 내렸어도 하나님, 나를 버리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팔을 펴서 나타내 보이신 그 능력을 오는 세대에 전하렵니다”(시 71:18 새번역).     하나님과 그 은혜 안에서 꿈꾸며 계속 성장하는 시니어는 나이는 들겠지만 늙지 않는다. ‘은빛 청년들(silver youth)’이다. 이들에게 있어 시간이라는 것은 어쩌면 일직선상으로 흐르는 크로노스의 물리적 시간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생애 동안 ‘의미있고 가치있는 삶’을 추구하고 싶은 질적이고 주관적이고 위로부터 임하는 카이로스의 시간 개념에 가깝다.   나이 듦은 하나님의 부름으로부터의 멀어짐이나 떠남이 아닌 그 안에서의 지속적 ‘머묾’과 ‘자람’이다. 시니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사역이 활성화되면 교회 안팎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 것이다.     이런 새로운 변화에는 우리 한인 사회와 교계의 지원과 연대가 요구된다. 이를 위해 시니어 사역의 지속성과 함께 전문성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소 늦었지만 이제라도 시니어의 영적, 정신적 성장을 도와 문화적 성숙과 영적 지혜로 교회와 세상을 섬길 ‘은빛 청년’ 시니어들을 양육할 수 있는 공동체가 곳곳에 세워져야만 할 때다. 이상명 / 캘리포니아 프레스티지 대학교 총장성서로 세상읽기 초고령화 은빛 초고령화 사회 초고령화 속도 초고령 사회

2025-05-05

[성서로 세상읽기] 중독 권하는 사회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마리화나 합법화를 지지하는 이들의 주장이다. 마약은 성매매와 더불어 ‘피해자 없는 범죄(victimless crime)’로 인식된다. 자신에게 해가 될 뿐,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게 아니라면 마리화나도 규제 대상에서 풀어야 한다는 논지다.     이런 주장의 이면에는 경제적 논리가 도덕적 규범보다 앞선다. 즉 경제적 논리에 근거한 현실론이다. 마리화나 산업은 새로운 세원(稅源)으로 주목받고 있다. 경제적 이유에서 마리화나 합법화가 불가피하다는 지론을 편 대표적 인물은 신자유주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이다. 그는 마약 규제가 수요를 전혀 규제하지 못하고 사회적 비용만 초래하는 낭비가 심한 정책이라 주장한다. 따라서 마리화나를 합법화하고 여기에 높은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사용을 통제하는 것이 효율적 정책이라는 것이다.   현재 50개 주 가운데 38개 주와 수도 워싱턴 DC의 경우, 의료용 마리화나는 합법이다. 미국 전체 인구의 3/4에 해당하는 약 2억 5500만여 명이 의료용 대마초 합법화 지역에 살고 있다. 미국 내 마리화나를 합법화하는 주가 늘어나면서 마리화나 산업은 2024년에 400억 달러 규모로 급등하고 있다.   유엔마약범죄사무소(UNODC)는 마리화나를 합법화한 주에서 청소년 대마 흡연자가 늘었고, 청년층 자살 비율이 증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마리화나는 더 센 마약의 입문 역할을 하는 ‘게이트웨이 마약’으로 작용한다. 마리화나는 다른 독성 마약인 펜타닐을 가미한(fentanyl-laced) 마리화나의 불법 유통과 소비를 부추기게 하여 뉴욕, LA, 샌프란시스코, 필라델피아 등 대도시를 소위 ‘좀비 랜드’로 만들고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18~49세 미국인 사망 원인 1위가 펜타닐 중독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마리화나 합법화 이후 미국의 대도시는 몸도 마음도 무너진 마약 중독자들로 인해 급속히 황폐화하고 있다. 미국 내 마리화나 합법화 이후 중독이 증폭되고 그것을 권하는 사회 병리 현상은 심각히 우려할 일이다. 담배보다는 마리화나를 피우는 것이 그래도 낫다는 논리가 공론화될 정도로 우리 사회의 무너진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고 아프다.     마리화나가 헤로인이나 코카인은 물론이고 담배나 술, 심지어 카페인보다도 의존성과 금단성이 낮다는 미국약물중독연구소의 보고서를 들이밀면서 마리화나 합법화를 주장하는 이들이 현실적으로 설득력 있어 보인다. 그러나 마리화나가 특별히 청소년의 기억력, 운동 능력, 심리적 요인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여러 보고서를 통해 증명된 바 있다. 마리화나를 장기적으로 사용하면 그것의 주요 성분인 THC(향정신성 효과를 내는 성분)가 뇌의 수용체에 결합하여 화학작용을 일으켜 일상 시스템의 균형을 깨뜨리게 된다.   마리화나를 둘러싼 논쟁의 본질은 이런 의학적 주장이 아니다. 보다 근원적인 문제는 인간 영성에 있다. 물질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황폐해진 인간의 정신과 영성이 문제다. 중독의 기재는 두려움이다. 현대인을 중독에 빠뜨리는 것들은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     알코올, 니코틴, 마약, 향정신성 약물 등을 비롯한 물질 중독과 도박, 성, 인터넷, 게임, 관계, 음식, 쇼핑, 일 등을 포함한 비물질 중독이 그런 것들이다. 이는 인간이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병약해졌다는 방증이다.   중독은 그것을 유발하는 물질의 문제이기 전에 그것에 의존하려는 인간의 문제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주체하지 못하여 여러 물질에 의존한다면 인간다움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인간을 위해 중독을 권하고 공공연히 합법화하는 사회는 이미 심각히 비인간화된 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중독을 권하는 사회 속에서 인간의 본질을 잃지 않으려면 자신의 몸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인식하는 영성 회복밖에 없다. ‘몸-성전(body-temple)’이라는 의식이 사라질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다움은 사라지고 중독 권하는 사회가 버젓이 자란다.   영성 회복은 중독 권하는 사회에서 종교가 되짚어 보아야 할 가장 본질적인 사역 가운데 하나다. 이상명 / 캘리포니아 프레스티지 대학교 총장성서로 세상읽기 중독 사회 마리화나 합법화 마리화나도 규제 의료용 마리화나

2025-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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